대인 공포증의 모든 것 Ⅱ: 역사 2

 

고대시대(B.C 500 – A.D. 500)

 모든 학문들의 시작이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학문적인 관점에서 정신 질환 역시 그리스 시대에서 시작되고 학술적인 의미에서 치료 역시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 간다. 그 시대에는 정신 질환 환자를 히스테리아(hysteria)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그들을 치료를 했었다. 히스테리아라는 말은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가 만든 이름이었다. 그리스어로 히스터(hyster)라는 말은 자궁이라는 뜻이고 ia 라는 말은 병이라는 말의 조합으로 그리스어로 자궁이 돌아 다니면서 병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주로 여성들의 정신 질환으로 사용되었다(Ellenberg, 1970).

중세 시대(500 – 1500)

 히스테리아라는 정신 병의 이름은 중세를 거치면서 사라지게 된다. 중세 시대는 기독교 시대로써 사람이 죽으면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몸은 분해되어 사라지지만 마음은 영혼으로 천국에 간다는 기독교 사상에 의해서 그리스 시대의 몸과 마음은 중세에서는 육체와 영혼으로 바뀌게 된다. 정신이 이상한 정신이상자들은 악령, 귀신, 마녀, 악마 등이 침입한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 귀신에 사로잡힌, 귀신이 침범한 사람의 치료는 침입한 귀신을 쫓아내는 굿을 하는 exorcism 인 퇴마의식(退魔儀式)으로 바뀌게 된다. 귀신이 몸 안에서 더 이상 머물지 못하게 몸에 고통(채찍으로 때리거나 바늘, 가시로 찌르거나 혹은 목을 조이거나 폭력을 사용)을 가해서 귀신이 더 이상 고통 때문에 몸 안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 방식의 치료가 퇴마의식의 핵심이다.

최근에 외국에 거주 중인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떤 종교 행사로 호텔에서 발짝을 한 동료를 때리다가 사망한 사건이 신문에 보도된 것을 소개 한다.

독일에 거주 중인 한국인들이 퇴마의식을 한다며 여성을 사망에 이르게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5(현지시간)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이하 프랑크푸르트) 인터컨티넨탈 호텔 객실에서 41 한국인 여성이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여성의 사망 원인은 심한 흉부 압박에 따른 질식과 목에 가해진 외상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여자의 몸에는 시간 동안 침대에 묶여 복부와 가슴에 매질을 당한 흔적이 있었다. 신음 소리를 막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수건과 옷걸이가 입을 막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검찰은 초기 조사 결과 사망자가 적어도 2시간 넘게 잔인하게 취급 받은 것으로 추정했다 (2015, 12, 10., 한국일보).

중세 시대의 이런 귀신 이론으로 수 많은 정신이상자들이 귀신에 붙잡힌 사람 혹은 귀신에 사로 잡힌 사람으로 오인되어 유럽에서 화형식으로 처형을 당했는데 그 때 회생된 사람들이 10만 명이 넘었다는 기록이 있다(Master & Johnson, 1985)(프랑스의 성녀(聖女) 쟌다크는 마녀로 화형을 당한 대표적인 사람). 이들은 마녀 사냥(Witch hunting)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사회, 정치적인 용어로써 사용되고 있다. 즉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어서 처벌을 가하는 것을 말하는 용어로 남아 있다(Ellenberg, 1970).

 현대 시대(1500 – 이후): 과학의 등장과 계몽주의 시대

 1772년에 한 개의 커다란 이벤트로 인해서 역동적 정신 의학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신부인 가스너(Gassner)가 귀신이 들린 사람들을 치료를 해주는 귀신을 쫓아내는 굿을 하면서 오스트리아 전국으로 순회를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주목을 하게 되었다. 가스너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인 시장 혹은 광장에서 귀신에 들린 사람들을 대상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굿을 직접 시범으로 보여주는 이벤트를 행사하면서 전국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Ellenberg, 1970).

 가스너는 신부 복장을 하고 성경과 십자가를 들고 귀신이 들린 사람들을 가스너 앞에 데리고 오게 해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어떻게 귀신을 쫓아내는가?를 직접 보여주었다. 발짝을 하는 사람을 붙잡고 있거나 혹은 눕혀놓고 십자가와 성경책을 들고 귀신에게 갖다 대면서 귀신아! 물러나라! 네가 스스로 몸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너를 불태워 죽이겠다라고 외치면서 십자가와 성경을 몸에 가져다 되면 귀신 들린 사람은 고통으로 고함을 지르고 발짝을 하고 몸부림을 치면서 수 시간 동안 발짝을 하다가 나중에는 힘이 빠지고 스스로 풀리면서 조용하게 일어나서 걸어서 멀쩡하게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귀신이 몸 밖으로 나갔기 때문이라고 믿게 된 것이었다. 이런 현상들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사람들이 믿게 되는 소동이 일어나게 되었다(Ellenberg, 1970).

가스너가 귀신을 쫓아내는 굿을 하면서 전국으로 돌아다니는 소동이 일어나면서 캐토릭 교구의 책임자에게 이 소문이 귀에 들어가게 되면서 캐토릭 교구장의 명령으로 일종의 수사 위원회가 열리게 되었다. 과학자, 의사, 신학자 등의 명망 있는 대표자들 4 명이 가스너를 조사를 하게 되었다. 가스너가 직접 귀신을 쫓아내는 굿을 하는 퇴마의식에 참가를 해서 어떻게 귀신을 쫓아 내는지를 조사를 하게 되었다(Ellenberg, 1970).

 이 조사 위원들 중에 한 사람인 의사 출신의 메즈머(Mesmer)가 있었다. 그는 가스너의 퇴마의식을 보고 나는 십자가와 성경책이 필요 없다, 내 손가락 하나로써 똑 같은 현상을 가져올 수 있다라고 주장을 하면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시범을 보여주면서 역사적인 사건으로 등장하게 된다(Ellenberg, 1970).

조사 위원회의 보고서로써 가스너는 신부의 본업으로 돌아가라는 교구장의 명령으로 자신의 교구로 돌아가서 자신의 교구 안에서 명망 있는 성직자로부터 의뢰된 환자들만 귀신을 쫓아내는 굿(exorcism )을 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역사에서 퇴장을 하게 된다. 가스너가 사라진 자리에 메즈머가 등장을 하게 된 것이다.

 메즈머는 신학을 공부를 하다가 철학과 법학으로 다시 나이 많은 만학도로서 의학을 공부해서 의사가 된 사람이었다. 메즈머는 영국의 한 의사가 자석으로 질병을 치료를 한다는 논문을 보고 연구를 하다가 자석 치료 이론을 개발한 사람이었다.

메즈머가 등장할 당시에는 과학이 등장을 하면서 전기 이론과 자석이론, 자장 이론, 전기 저장 등의 이론들과 그리고 도시 국가들의 통합으로 절대 왕권이 들어서면서 사회 질서가 잡히고 안정된 사회가 도래하면서 이 시점에서 때마침 계몽주의 시대가 함께 열리게 되었다. 계몽주의 시대의 이념인 학교의 설립과 의무 교육, 자유 교육의 원리가 적용되어지면서 대중이 무지, 미신, 맹목적인 믿음의 중세 시대에서 이성, 과학, 교육으로 변화되어가는 사회적 영향력의 결과로써 메즈머의 인기가 높아지게 된 비결이 위와 같은 시대적인 산물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Ellenberg, 1970).

 귀신을 쫓는 굿을 하는 퇴마의식을 하던 가스너(Gassner)에 대해서 메즈머(Mesmer)의 승리는 역동적 정신 의학의 관점에서 볼 때 무지, 미신, 맹목적인 믿음의 중세의 시대에 대한 과학, 이성, 배움의 승리로 보고 있다. 즉 귀신에 사로 잡힌 사람을 정신이 병든 사람으로 귀신을 쫓은 굿으로부터 정신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 하는 치료 이론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귀신에 사로 잡힌 사람은 정신병에 걸린 환자로 귀신을 쫓아내는 굿은 환자를 치료 하는 치료 이론으로 바뀌면서 정신 의학에서 획기적인 변화의 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시대의 영향력으로 과학은 인간의 번영을 위해서 응용되어져야 한다는 계몽주의 정신에 의해서 그리스 시대의 정신병인 히스테리아(hysteria)가 다시 재 등장하게 된다. 히스테리아 환자를 치료하는 치료 기법으로 메즈머가 자석 치료 이론을 들고 나온 것이었다.

 메즈머는 자신의 치료 이론으로 동물 자장 이론 혹은 자석 이론을 개발을 했다. 이 이론은 건강한 사람의 몸에서 유체가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의 몸으로 이동을 한다는 유체 이론을 만들어냈다. 그는 만유인력에 버금가는 새로운 획기적인 발견을 했다고 논문으로 이론화 하고 책으로 출판을 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등장을 하게 된 것이다(Ellenberg, 1970).

 메즈머는 자신의 치료소로 몰려드는 히스테리아 환자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자 바퀘(Baquet)라는 알루미늄의 반 원통을 만들어서 그 곳에 건강한 사람들의 유체가 저장된 것으로 그리고 라포(rapport)라는 구리 막대기로 히스테리아 환자들에게 건강한 유체를 주입시키는 도구로 사용을 하면서 알루미늄 반 원통을 히스테리아 환자들이 손을 마주 잡고 둘러싸고 치료를 하는 집단 치료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으로 기록이 되고 있다(Ellenberg, 1970).

 그 당시 유럽에서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에 메즈머 열풍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 황제의 섭정 왕후인 마리아 테레사(섭정 왕후)의 몸종으로 16세의 악사(음악 기쁨조)인 장님 소녀가 메즈머의 열풍을 보고 메즈머를 초빙해서 자신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는 요구에 메즈머가 자신의 자석 치료가 만병 통치 약으로 과신을 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장님을 치료 했으나 장님이 눈을 뜨지 않았다는 것일 밝혀지면서 메즈머의 인기는 추락했고 메즈머는 오스트리아에서 프랑스로 이동을 해서 프랑스에서 자신의 서적과 치료 시범으로 전국적인 선풍을 일으키게 되었다(Ellenberg, 1970).

 그 당시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의 전야로 사회가 혼란하고 불안정한 요인도 메즈머의 인기가 상승한 한가지 요인으로 보고 있다. 메즈머가 폭풍적인 인기로 전국이 떠들썩 하게 되면서 프랑스에서 왕립 의학 아카데미와 과학 아카데미 그리고 감사위원들로 구성된 수사 위원회가 열리게 되고 화학자 라보아제(산소를 발견한 화학자), 과학자 플랭클린(피뢰침으로 천둥과 번개를 전기 현상을 밝혀낸 미국인 과학자)(미국 대사로 프랑스에 근무 중), 의사인 킬로틴(단두대를 고안한 의사) 등의 수사 위원회가 메즈머가 주장하는 만유 인력에 버금가는 유체 이론이 사실인가를 수사하게 되었고 그 결과 유체 이론이 허구임을 밝혀냈다 그러나 치료의 효과는 부인되지 않았다. 이 치료 효과를 이미지 탓으로 돌렸다. 메즈머는 실망해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Ellenberg, 1970).

 메즈머는 스스로 역사적으로 위대한 발견을 하고도 그것을 모르고 죽은 두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메즈머는 최면학(이후에 제자들이 최면학으로 발전)을 발견하고도 그것을 몰랐고 그리고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도 그것이 신대륙이라는 것을 모르고 죽은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다. 메즈머는 자신의 발견을 독점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제자들을 양성하지 못했고 자신의 발견을 후계자들이 계승하지 못하게 한 것으로 기록이 되고 있다(Ellenberg, 1970).

 메즈머가 발견한 자석 치료 이론은 이후에 프랑스 귀족들에 의해서 연구가 이어져서 계속되어지게 된다. 메즈머의 후계자로 자석 치료 이론은 프랑스의 포병 장교인 푸이세이그(Puysegur) 3명의 형제들에 의해서 명맥이 이어지게 된다. 푸이세이그는 자신의 부대의 부하인 빅토르(Victor)가 군대의 사열 도중에 발짝으로 쓰러져서 푸이세이그가 연구하고 있는 자석 치료의 도움으로 잠이든 상태와 유사한 상황에서 서로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것을 연구해서 학회에 보고를 하면서 본격적인 연구와 제자들의 양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Ellenberg, 1970).

 푸이세이그(Puysegur)는 자신의 발견을 인공 몽유병 혹은 인공 잠(artificial sleeping)으로 이름을 붙였다. 잠을 자거나 혹은 몽유병과 유사한 상태에서 서로 말을 주고 받을 수 있지만 깨고 나면 기억을 하지 못하다는 인식에서 따온 용어로 사용을 했다.

 메즈머의 유체 이론은 수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그 신비스런 배일이 하나씩 벗겨지게 된다. 1813년에 폴투칼 출신의 신부인 파리아(Faria)가 물리적 유체 이론의 비판을 들고 나와서 자석 치료의 효과는 자석 자체의 효과가 아니고 그 대상인 주체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그 주체를 걸상에 앉히고 손을 들어올리게 한 뒤에 잠을 자라라고 명령을 해서 최면에 걸리게 되는 현상을 발견을 하고 이런 현상을 파리의 군중들 앞에서 시범을 보였지만 군중들이 마술로 착각을 하면서 그를 조롱한 것이 그의 이론이 더 이상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Ellenberg, 1970).

이후에 인공 잠, 인공 몽유병으로 불리던 자석 치료는 영국 만체스트의 외과 의사인 브레이드(Braid) 1843년에 잠에 빠지게 만든다는 이름으로 그리스 잠의 여신 히포노 hypno로 이름을 따와서 최면학(hypnosis)으로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Ellenberg, 1970).

 여기에 해군 장교인 노이제(Noizet), 경험주의 철학자 들레즈(Deleuzer) 그리고 괴짜 의사 라보(Liebeault) 등에 의한 연구에 의해서 최면이 초자연적인 현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의사이자 엔지니어인 베르트란드(Bertrand))는 과학적 실험 안에서 최면을 탐색 하면서 최면의 효과는 자석 치료자의 제시의 효과이고 메즈머가 사용하던 라포(rapport)라는 구리 막대기는 치료사와 환자 사이에 심리적인 유대관계의 효과임을 밝혀냈다.

 메즈머의 동물 자장 이론 혹은 자석 치료 이론은 이후에 최면학으로 발전을 하게 되지만 학자들은 자석 치료와 최면 치료를 구분해서 분류를 하고 있다. 같은 히스테리아 환자들을 치료를 했지만 전자는 19세기 초반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실제로 1815-1880년까지 프랑스에서는 자석 치료에 관계된 논문집이 9개가 되었다고 밝히고 했다. 후자는 19세기 후반기에 전성기를 누렸다는 점 그리고 메즈머가 최면이라는 것을 몰랐고 그의 치료 이론과 기법은 고로 고대 마술에 가까운 것으로 후자는 자석 치료의 신비적인 부분이 벗겨지면서 이름도 바뀌고 치료의 과정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치료를 하는 사람들도 전자를 자석 치료사로 그리고 후자를 최면 치료사로 구분해서 부르고 있다(Ellenberg, 1970).

 자석 치료 이론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최면학으로 19세의 후반기를 전 세계를 휩쓸게 되었는지를 살펴 보고자 한다.

낸시(Nancy)라는 곳에서 라보(Liebeault)라는 괴짜 의사가 히스테리아 환자들을 대상으로 이상한 치료를 무료로 해주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던 의과 대학 내과 교수인 베린헤임(Bernheim)이 그를 방문해서 그것이 최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가 이것을 연구해서 최면학 교과서를 출판하고 그와 협력해서 최면을 치료를 하는 낸시 학교(Nancy School를 설립하게 되어 본격적인 연구와 제자 양성으로 등장하게 된다(Ellenberg, 1970).

 한편 최면학을 공부를 한 외과 의사 브리켓(Briquet)이 자비 병원의 원장이 되면서 300명의 히스테리아 환자들을 치료를 하면서 히스테리아(hysteria)라는 책을 출판 하게 되면서 이름이 나게 되자 신경과 의사인 가르코트(Charcot)가 이것을 전수를 받아서 이전에 세 번이나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을 했으나 거부 되어 오다가 가르코트가 살페트리에(Salpetriere) 병원의 원장이 되면서 1885년에 프랑스 과학원에서 가르코트의 최면 이론을 수용하고 인정하게 되면서 전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떠 오르게 되었다(Ellenberg, 1970).

1870-1893년까지는 가르코트의 전성 시대가 열리게 된다. 건강한 사람을 최면을 걸어서 마비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제자들을 통해서 시범을 보이게 되면서 가르코트는 히스테리아 마비, 최면의 마비, 상처 후 마비 등을 동격으로 주장하게 되면서 이것을 반대하는 베른헤임(Bernheim) 교수와 대립으로 이어져서 프랑스의 최면학은 두 개의 갈래가 나누어지게 되었다.

 가르코트(Charcot) 4000-5000명의 히스테리아 환자, 매춘부, 부랑아, 거지 등의 합숙소를 일약 히스테리아의 연구 실험 병원으로 만들면서 히스테리아의 황제라는 별명으로 세계적인 명사가 되었다. 가르코트의 이름을 딴 살페트리에 학교(Sapletriere School)가 창설이 되어 프랑스에서 두 개의 최면 학교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Ellenberg, 1970).

이 시점에서 20세기를 주도하게 될 세 사람의 역동적 정신 의학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오스트리아의 신경과 의사인 프로이트(Freud)가 가르코트에게 히스테리아 환자의 치료를 위해서 최면학을 공부를 하기 이해서 가르코트의 병원에 유학을 오게 되었고 미국의 심리학의 아버지 윌리암 제임즈(Williams James)가 최면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가르코트의 살페트리에 병원을 찾게 되었고 프랑스의 신경과 의사로써 최면학을 공부하게 된 피에르 장(Pierre Janet)이 가르코트의 병원에서 치료사로 시작하게 되는 역사적인 사건이 등장하게 된다.

이후에 프로이트는 가르코트 밑에서 최면학을 공부를 해서 최면학의 부족한 부분을 개선해서 정신분석학을 탄생시켰고 윌리함 제임즈(Williams James)는 하버드 의과 대학을 졸업한 의사로써 최면학에 매혹되어 환자를 치료를 하다가 미국에서 심리학 개론의 책을 출판하고 미국의 시카고 대학에서 심리학을 강의를 하면서 미국의 심리학의 아버지로 등장을 하게 된 사람으로 이론적이고 학문적 심리학 보다 치료를 강조하는 응용 심리학 쪽으로 발전을 시킨 사람으로 그리고 피에르 장(Pierre Janet)은 프랑스의 한 고등학교에서 철학 교사로 있다가 의과 대학에 들어가서 의사가 된 사람으로 최면학을 공부해서 가르코트(Charcot) 병원에서 히스테리아 환자를 치료하면서 한 사람 안에서 여러 개의 자아가 존재하는 해리 장애(빙의 현상)를 학문적으로 연구해서 밝혀낸 사람으로 프로이트(Freud)의 명성에 가려져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에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들에 의해서 자석 치료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증세 발짝을 유도하는 것은 카타르시즈 효과(감정 방출 효과)라는 것과 최면의 핵심은 치료자의 제시(suggest)라는 것(설득) 그리고 환자들의 심층에 고착된 아이디어들의 수정(인지치료)이 치료의 핵심이라는 것들이 하나씩 밝혀지게 되어 이들이 통합되어져서  20세기에 심리치료(psychotherapy)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게 된다.

사회문화적인 사건들과 역동 심리학의 등장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 문화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역동적 정신 의학에 대한 영향력 안에서 만 논의를 해보자. 프랑스 혁명으로 귀족 계급이 몰락하고 새롭게 등장한 상공업의 중류 계급인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면서 귀족들이 독점을 한 최면학을 전수 받게 된다. 귀족들은 히스테리아 환자를 최면으로 치료를 하면서 무료로 치료를 해 주었다. 귀족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계층으로 직접 노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적인 여유로 취미로 최면학 혹은 과학적인 연구에 종사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새로 등장한 부르주아 계급들은 최면학을 배우서 돈을 받고 치료를 해 주는 전문인으로 등장을 한 것이다.

 여기에 1848년에 산업 혁명의 영향으로 공장에서 대량 생산으로 이어지면서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농부들이 도시로 모여들면서 대도시가 등장을 하고 생산품들이 대량 생산으로 물류 거래가 확대되고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게 되면서 새로운 계급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 플로레타리아 계급 즉 노동자와 농민의 계급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동시에 1848년에 칼 맑스(Karl Marx)와 프레드리히 엔젤(Freidrich Engels)이 공산당 선언서를 발표했고 이 공산주의 선언서는 20세기의 세계를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 냉전으로 몰고 올 신호탄이 발사 된 것도 이 시쯤이었다.

 1845년에 크리싱그(Griesinger)가 정신 의학 교과서를 출판하고 1860년에 쥬리히의 불루고졸리(Burgholzli)에서 대학교 정신병원을 설립하면서 정신 의학의 획기적인 발전이 시작되었다. 그는 1867년에 정신의학 교과서의 두 번째 수정 본으로 뇌-해부학-병리학을 정신병의 핵심으로 뇌가 마음의 연구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서 정신 의학의 연구가 대학교수의 중심으로 이동을 하게 되고 심리적 과정의 가장 큰 부분이 무의식, 감정과 욕구의 중요성과 고착된 아이디어가 심리적 원인이 된다는 주장으로 정신병원의 조직과 대학 정신의학의 창설자로 독일의 정신의학이 프랑스의 정신의학보다 앞서게 만든 장본인으로 평가 받게 만든 사람이 되었다. 그의 제자인 웨스트팔(Westpal)(광장 공포증의 발견), 메이네이트(Meynert)(프로이트의 스승으로 신경학자), 웨네카(Wernicke)(뇌의 언어 지역의 규명)등이 정신병에 생리조직적 접근이 신경정신과의 출발점이 되었다.

역동적 정신의학은 제외되었지만 이후에 부르고졸리의 대학 정신병원에 후임 원장이 된 유진 블루러(Eugen Blerler)(1911년에 정신분열증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사람으로 정신분열증 연구의 개척자)에 의해서 신체 조직적 정신의학과 역동적 정신의학의 통합을 달성하게 된다(Ellenberg, 1970).

 정신 의학과(psychiatry)는 신경과(neurology) 보다 늦게 등장한 것이 눈 여겨 볼만하다. 가르코트와 프로이트는 의과대학에서 신경학을 전공한 신경과 의사들이다. 19세기 말은 실증주의와 실험 심리학의 영향으로 그들의 스승들에 의해서 모든 심리적인 현상들을 신경과 뇌의 설명으로 이어지면서 신경학이 발전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20 세기에 들어오면서 프로이트가 신경학적인 설명을 줄이고 새로운 순수한 심리 과학적인 설명으로 마음의 현상을 설명을 한 것이 정신분석학이 탄생하게 된 동기가 된 것이다.

 19세기 말에 눈 여겨 볼만한 것은 신경쇠약증을 비롯해서 새로운 증세들 즉 공포증, 강박증, 불안 신경증 등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

 1869년에 미국의 의사인 조지 비어드(George Beard)가 신경쇠약증(neurasthenia)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플로레타리아들이 공장에서 노동을 하면서 에너지가 고갈되고 피로하고 짜증을 내고 입맛이 상실, 두통을 동반하고 시끄러움과 빛에 예민하고, 신경통과 불면증을 동반하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등장하는 새로운 정신질환이 등장한 것이다(Ellenberg, 1970).

 19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정신 장애로써 대표적인 두 개의 정신적인 질병으로 히스테리아와 신경쇠약증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히스테리아는 이미 이전부터 존재해 왔었다. 주로 여성들이 많이 걸리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새로 등장한 신경쇠약증은 남자들이 많이 걸리는 정신질환으로 두 개의 정신질환이 남자와 여자의 병으로 새롭게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Ellenberg, 1970).

 신경쇠약증의 치료로써 미국인 의사인 웨어 미첼(Weir Mitch)은 푹 쉬면서 충분한 휴식을 하고 풍부한 영양가의 음식의 섭취해서 영양 공급을 하고 그리고 마사지로 몸의 피로를 풀어내는 치료 방법을 고안해서 음식 박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러한 신경쇠약증과 그것의 치료 기법은 대서양을 건너서 유럽으로 펴져 나갔고 전 세계적으로 120년 동안 신경쇠약증이 활개를 치게 되었다(Ellenberg, 1970).

19세기 말에서부터 등장하게 된 새로운 증세들과 장애들

1971년에 웨스트팔(Westpal)이 사람들이 붐비는 곳 즉 교회, 극장, 대형 식당 등에 출입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구로써 광장 공포증(agoraphobia)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에고라(agro)나는 말은 그리스어로 시장(market)이라는 말로서 시장에 가는 두려움을 말한다. 비슷한 시기에 모넬(Morel)이라는 의사를 통해서 공포증(phobia)이라는 말이 등장을 하고 크리스하베(Krishaver)에 의해서 불안 신경증이라는 말들이 등장하게 된다(Barlow, 1985).

불안 공포증과 불안 신경증들의 등장을 세부적으로 고착해 보자.

1871년에 다코스타(Dacosta)가 미국의 남북 전쟁 후에 300여명의 군인들 가운데서 심장이 벌떡거리고 호흡이 빨라지고 맥박이 뛰고 현기증이 나고 질식할 것 같은 새로운 증세들을 보고를 하면서 심장이 화를 낸 것:””심장이 짜증을 낸 것으로 보고를 했다. 1917년에 제 1차 세계대전 시에 영국의 의사인 레이스(Lewis)가 군인들 사이에서 다코스타가 발표한 증세와 유사한 증세들이 보고 되면서 결렬한 신체 활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보고를 했다(Dupont, 1983).

1940-1950년대 오펜하이머(Openheim)와 코헨(Cohen et al)이 전염병 역학 연구에서 공통적인 증세로써 군인들 한데서 등장했던 증세들을 보고하면서 이것을 신경 순환 쇠약증”, “혈관 규제 신경 쇠약증”, “심장발작 항진증등의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1960년대에 로스(Roth) 135명의 환자들을 치료 연구를 하면서 이들의 이름을 불안 공포증으로 이름을 붙였다.

미국에서 1967년에 등장한 DSM-Ⅱ에서 신경쇠약증 대신에 불안 신경증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Dupont, 1983). 1960년데 남아공 태생의 죠셉 울프(Joseph Wolpe)가 행동 의학, 행동 과학으로 공포증 치료에 획기적인 치료 기법을 소개를 하면서 등장을 했다. 공포증 치료에서 노출증 치료와 조직적 감각 박탈 등의 새로운 치료 기법을 소개를 하면서 공포증 치료가 활기를 띄게 되었다(Dupont, 1983).

1979년에 뉴욕 하이트 플랜(White Plains)의 병원에서 공포증 치료센터가 설립이 되었고 켈리포니아 먼로 팍에서 아더 하디(Athur Hardy)의 공포증 치료가 TV와 미국전역으로 인기를 끌었다(Dupont, 1983).

1980년에 미국의 정신과 의학학회에서 미국 전국에서 이름난 약 300여명의 정신과 의사, 정신분석학자, 심리학자들이 모여서 DSM-Ⅲ의 세 번째 개정판을 출판하게 되면서 불안 신경증은 너무 용어가 포괄적이고 광범위해서 이름을 불안장애(불안증)으로 바꾸고 세부 항목으로 세부적으로 분류되고 정리가 되었다(Dupont, 1983).

1980년을 기점으로 해서 히스테리아(hysteria)와 신경쇠약증이라는 말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히스트레아 라는 말은 전환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신체화 장애, 히스트로닉 성격장애로 세분화 되어졌고 신경쇠약증이라는 말은 신경이라는 말이 빠지고 불안장애로 분류되고 불안증 안에서 다시 세분화 되어져서 공황장애, 광장 공포증, 특수 공포증, 대인공포증, 강박사고 강박 행동 장애,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급성 스트레스 장애 등으로 세분화 되어지게 되었다.

대인공포증의 모든 것 3 : 공포증 등장 에서는 공포증의 세부 분류로 공황 공포증, 대인공포증, 광장 공포증 특수 공포증(폐쇄 공포증, 고공공포증, 수행공포증 등)등의 등장과 그 중에서 이번 시리즈의 핵심인 대인공포증의 상황과 원인이 연속 시리즈로 이어지게 된다. 대인공포증의 모든 것 3부에 들어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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